RRL(더블알엘)은 미국의 개척정신을 담은 브랜드이자, 빈티지와 현대를 잇는 타임캡슐과 같다.
RRL(더블알엘)의 탄생
1993년 랄프 로렌과 그의 아내 리키의 이니셜을 딴, 자신의 콜로라도 목장 이름인 더블 RL(Double RL Ranch)에서 영감을 받아 RRL 브랜드를 만들었다.

RRL를 통해 랄프 로렌은 기존 폴로 랄프로렌이 보여주던 아이비리그식 프레피 스타일과는 결을 달리해, 빈티지 의류의 디테일과 기능성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스타일을 구현하고자 했다.
RRL은 진정성과 역사적 헤리티지에 기반한다. 출시 아이템인 셀비지 데님, 플란넬 셔츠, 가죽 자켓 등 모두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작업복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랄프 로렌의 개인적 열정으로 시작된 브랜드이다 보니, 초기부터 품질에 많은 신경을 썼다. 예를 들어 셀비지 원단은 일본과 미국의 최상급 데님 원단을 사용했고, 가죽 원단과 단추 및 지퍼와 같은 부자재 역시 옛 고증 살리면서도 최상의 소재를 사용했다.
베일에 싸인 브랜드
RRL은 런칭 직후 베일에 싸인 듯한 행보를 보였다. 대중적인 마케팅보다는 서부 패션을 사랑하는 매니아층과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입지를 넓혀갔다. 이도 그럴 것이 RRL은 복각 위주의 빈티지 디자인임과 동시에 가격대가 높으니 처음 접한 일반 소비자들에겐 이해가 어려운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처음 접한 일반 소비자는 ‘낡은 옷이 왜 이렇게 비싸?’라는 말이 나온다.)
1997년 랄프로렌이 상장하면서 1998년 경 영업조직을 개편했다. 다수의 오프라인 매장과 여러 하위 브랜드가 정리되는 와중 RRL은 명맥을 유지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던 브랜드가 아닌지라 수익성 자체는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지한 것은 RRL를 사랑한 랄프 로렌의 입김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단단한 매니아층 형성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적으로 복각 데님과 헤리티지 워크웨어 붐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 RRL은 컬트(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문화적인 현상)적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일본 패션 매니아들은 RRL의 미국산 셀비지 청바지와 워크 재킷을 높이 평가했고, RRL의 주요 아이템들이 일본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RRL은 베일에 싸인 브랜드에서 ‘알 사람은 아는’ 브랜드로 성장하며, 독립적인 브랜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점 전까지 RRL은 주로 일부 랄프로렌 플래그십 스토어의 한 코너에서나 구매할 수 있었으나, 이 시점 이후부터는 첫 RRL 단독 매장이 문을 열었고, 매장 수는 점차 증가했다.
기존 출시되던 데님, 셔츠를 넘어 밀리터리 스타일 자켓, 카고 팬츠, 각종 액세서리 등 제품군이 확대되었다. 나아가 로우 스트레이트, 슬림 부츠컷, 버클백 진 등 다양한 핏으로 전개되어 데님 매니아들의 선택지를 늘렸다.
2000년대 중반 랄프로렌 본사는 젊은 층 공략을 위해 Rugby(2004년 런칭), Denim & Supply(2011년 런칭) 등의 새로운 하위 브랜드를 시도했는데, 이는 RRL과 컨셉이 일부 겹치기도 했다. Denim & Supply는 RRL의 빈티지 감성을 보다 저렴하고 캐주얼하게 풀어낸 라인으로, 2010년대 초반 젊은 소비자를 공략했지만 결국 2016년에 단종되었다. 결국 랄프로렌의 캐주얼 데님 부문은 RRL과 폴로 메인라인으로 재편되었고, RRL은 여전히 최고급 빈티지 복각 라인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 Rugby 라인업도 11년에 단종되었는데, 워낙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라인업이라 다시 재런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로벌 진출과 대중문화
2010년대에 들어 RRL은 북미를 넘어 해외 주요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1년 11월, 런던 메이페어 지역의 마운트 스트리트에 영국 첫 RRL 매장이 오픈하며 유럽 시장에 데뷔했다. 두 층 규모의 이 매장은 오픈 당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매장 내부는 미국에서 공수된 장인들이 잉글리시 오크로 만든 선반과 빅토리아 양식의 거울 간판 등을 설치하여 현지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RRL만의 빈티지 무드를 글로벌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 마운트 스트리트 매장은 주변 상권 변화로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2019년 런던 소호(Newburgh Street)에 규모는 작지만 더욱 컨셉에 맞는 새 RRL 플래그십 스토어로 재오픈했다. 새 매장은 리바이스 빈티지, 레드윙, 필슨 등 유사한 헤리티지 브랜드 숍들과 이웃하고 있어 타깃 고객층에 한층 접근하기 쉬워졌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쿄 오모테산도에 RRL 단독 매장이 들어서는 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RRL의 입지를 다졌다.(일본은 오래전부터 RRL 취급점이 있었고, 2010년대 중반부터 공식 플래그십이 운영됨)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직구나 병행수입으로만 접하던 RRL를, 2020년대에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가로수길 편집매장 등을 통해 정식으로 선보이기 시작하여 매니아들의 관심을 모았다.
RRL은 그 특유의 아메리카나 미학 때문에 영화, 드라마의 의상이나 음악가들의 투어 의상으로도 가끔 등장했다. 예를 들어, 서부극이나 복고풍 배경의 영화에서는 RRL의 의상이 실제로 활용되거나(혹은 참고자료로) 하기도 했고, 2010년대 중반 방영된 미드 ‘보드웍 엠파이어’, ‘데드우드’ 등의 시대극 분위기가 대중에게 어필하면서 RRL의 복각 수트와 조끼도 재조명받았다.

한편 패션 서브컬처 측면에서, RRL은 밀리터리 매니아, 데님 페이드 커뮤니티, 빈티지 바이커 문화 등과도 접점이 있었다. 헤리티지 워크웨어를 즐기는 이들은 RRL를 동시대 최고 수준의 복각 브랜드로 평가하며, 온라인 포럼에서 각자 소장한 RRL 아이템을 공유하고 착용 후기를 나눴다. RRL의 인디고 데님 팬츠가 수년간 착용 후 경연대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사례도 있고, RRL 가죽 재킷은 바이커 커뮤니티에서 빈티지 쇼트 퍼펙토 등에 필적하는 현대 명작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서브컬처의 지지는 RRL이 대중광고 없이도 견고한 브랜드 위상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랄프 로렌과 RRL
시대에 따라 약간씩의 부침은 있었지만, RRL만의 확고한 아이덴티티는 흔들림 없이 이어져 왔다. 오늘날에도 RRL은 빈티지와 현대를 잇는 타임캡슐 같은 브랜드로 사랑받고 있으며, 랄프 로렌이 창조한 미국적 럭셔리의 정수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전설로 평가받는다. RRL의 연대기적 발자취는 곧 랄프 로렌이라는 인물이 패션을 통해 구현한 아메리칸드림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적 정신과 빈티지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시작된 RRL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정체성을 지켜왔다. 높은 가격과 제한된 유통망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품질과 스토리텔링으로 전 세계 패션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2025년 현재에도 랄프 로렌 제국의 숨은 보석으로 자리하고 있다. RRL의 지난 역사는 단순한 브랜드 연대기를 넘어, 패션을 통한 과거와 현재의 대화였으며, 앞으로도 RRL은 그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