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서는 2024년 12월 7일 북경대학교 가치투자 과정 10주년을 기념하여 리루가 강연했던 대본을 정리한 문서다.
내용이 많아 5편으로 분리하여 정리하였으며, 다소 오역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유의하길 바란다. (영문이 더 편하다면,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직접 영문으로 읽어보길 권장한다.)
- 1편 서문 및 우리 시대의 난제들
- 2편 이러한 난제들의 근본적 원인과 본질에 대한 생각
- 3편 중진국 함정, 이를 극복하는 방법 그리고 현재 국제 관계에 대한 생각
- 4편 다시 가치투자로 돌아와서, 글로벌 가치 투자자로서 우리가 이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 5편 Q&A
- 참고 문헌 : 리루 포트폴리오
2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성찰 : 외형, 원인 그리고 본질
다음으로,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저의 성찰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딜레마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500년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산업화 이후 중진국 단계에 진입한 모든 국가들은 과도기적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는 어느 나라든 발전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보편적인 도전 과제입니다.
저의 저서 『문명, 현대화, 가치투자 그리고 중국』에서는 문명의 발전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1.0 단계(수렵·채집 문명), 2.0 단계(농업 문명), 그리고 3.0 단계(현대 과학기술 문명)입니다. 그리고 2.0 단계에서 3.0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저는 2.5 단계라고 부르는데, 현재 중국이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일본, 그리고 남미와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처럼 산업화를 경험한 나라들은 모두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것과 유사한 도전에 직면한 바 있습니다. 어떤 국가는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넘어섰고, 어떤 국가는 여전히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각국의 경로는 모두 다릅니다. 더불어, 인류는 아직 3.0 과학기술 문명 시대에 걸맞은 국제 관계 관리 모델을 확립하지 못했습니다.
딜레마의 원인
현대화의 본질은 시장 경제와 현대 과학기술의 결합에 있으며, 이는 지속적이고 복리로 성장하는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복리 성장(compound growth)’이라는 개념은 매우 인상적인 수학적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개방 초기 이후 중국의 실질 경제 생산은 45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명목 성장 수치는 더욱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경제는 복리로 성장한 반면, 사회적 거버넌스, 인간 심리, 정치 체계는 같은 수준의 복리적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 불일치는 인간의 본성이 약 20만 년 전 현생 인류(Homo sapiens)가 등장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의 경제 구조는 세 차례의 거대한 도약을 거쳤습니다 — 수렵·채집 사회, 농업 문명,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 문명으로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초기 산업화 도약 단계가 끝난 뒤에는, 경제적 복리 성장과 사회·심리·정치적 발전의 더딘 진화 혹은 정체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발생하게 되며, 이는 필연적으로 심각한 도전 과제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도전은 이 단계에 도달한 모든 국가들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중국의 지난 30-40년간 급격한 경제 변혁은 결코 중국만의 독특한 사례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산업화와 현대화를 오로지 독자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완수한 나라는 영국뿐입니다. 다른 국가들은 대개 30-40년에 걸쳐 추격형 산업화(catch-up industrialization)를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불과 30여 년 만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산업국가 러시아를 격파했습니다.
- 독일 역시 1871년 통일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약 30~40년 동안 산업화를 완수했습니다.
-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를 거쳐 1890년대에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비슷한 기간이 걸렸습니다.
-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 국가들도 2차 세계대전 후 급성장했지만, 1980~90년대에 중진국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렇듯 30~40년간의 복리 성장은 특히 경제 도약기에는 한 나라의 경제 구조를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사회적 거버넌스 현실과 큰 불일치(mismatch)를 초래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도전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사회는 이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원력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넘어서는 반면, 어떤 사회는 조정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혹한 결과가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전쟁 자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전후 개혁(post-war reforms)이 근본적인 해결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패러다임 전환의 사례들
이 전환기의 과정에서 개념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토지의 개념
2.0 농업 문명 시대에는 토지와 인구가 경제 규모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한 경제의 총생산력을 사실상 정의했으며, 농업에는 성장의 한계, 즉 맬서스 함정(Malthusian Trap)이 존재했습니다.
결국 인구 증가가 토지가 제공할 수 있는 부양 능력을 초과하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영토 확장이 사회, 민족,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고, 역사적 인물들도 대개 영토를 확장하거나 침략으로부터 방어한 업적으로 기억됩니다.
반면, 3.0 과학-기술 문명 시대에는 지속적이고 복리로 성장하는 경제의 원동력이 토지와 인구가 아니라, 시장 규모와 생산 요소의 완전한 순환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옛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충돌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핵심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모든 국가들은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인간의 토지에 대한 심리적 집착이 갈등을 증폭시켜 결국 세계 대전으로 확산됩니다.
산업화된 유럽은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고, 참전했던 모든 제국이 몰락하는 대전쟁으로 빠져들었으며, 결국 아무도 전쟁 목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 결과를 알았다면, 어느 누구도 전쟁을 시작하거나 동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승자마저 엄청난 대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본질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이었고, 똑같은 뿌리 깊은 영토 본능이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된 전쟁이 낳은 참상은 훨씬 더 컸고, 전 세계 사망자는 1억 명을 넘었습니다. 참전한 모든 제국과 국가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과 일본처럼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들은 전후 개혁을 통해 전쟁으로는 이루지 못했던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양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독일과 태평양 전쟁의 주범인 일본은 모두 이른바 ‘생존 공간 확보’라는 명목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전시 동원 역시 국가 생존과 민족 경제 발전이라는 서사로 포장됐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실패한 이 목표들이 전후 평화 시대에 오히려 실현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나라는 지속적이고 복리로 성장하는 경제적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점령한 모든 영토를 원래 국가에 무조건 반환합니다. 이는 이전 전쟁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전례 없는 조치였습니다. 대신 미국은 자국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이 시스템은 국제 무역, 상품 교류, 자본 흐름 등을 포괄하며, 미국의 동맹국들 모두가 이 시스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국경 없는 경제 성장이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가능해졌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3.0 과학-기술 문명 시대에 들어서면서 토지가 더 이상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시장 규모와 기술·노동·자본과 같은 경제 요소들의 자유로운 흐름이 성장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인간 본성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의 2.5 전환기 단계에서는 이러한 토지와 영토에 대한 집착이 언제든 민족주의적 광기를 촉발할 수 있는 위험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는 수만 년간 인간의 뇌에 각인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가상경제와 실물경제의 이분법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정책들은 ‘실물경제’와 ‘가상경제’를 구분하며, 실물경제를 지원하고 가상경제로 향하던 자원을 실물 부문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는 일정 부분 타당합니다. 농업에서 산업으로 자원을 전환하던 시기에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제가 2.5 단계, 더 나아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면 이런 구분은 시대착오적이며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디오 게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가상경제’로 분류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전장(戰場)에서는 탱크, 기관총, 심지어 비지능형 미사일보다도 지능형 드론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드론들은 대부분 숙련된 게이머들이 조종하고 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무려 100만~200만 대의 전투용 드론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드론을 조종하는 기술력은 대부분 게임을 통해 축적된 능력입니다. 이 사례만 봐도 이른바 ‘가상’과 ‘실물’이라는 구분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소프트웨어는 실물경제일까요? 가상경제일까요? 오늘날 전 세계 경제는 소프트웨어 없이 굴러가지 않습니다. 중국 경제도,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실물경제 육성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반도체 산업을 보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엔비디아(NVIDIA)는 일반적으로 실물경제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1993년 창립 이후 엔비디아는 반도체 웨이퍼를 단 한 장도 직접 생산해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생산을 TSMC에 외주를 줬기 때문입니다. 엔비디아는 본질적으로 반도체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로, 가상경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닙니다. AI 열풍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엔비디아의 주요 제품은 게임용 그래픽카드(GPU)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실물경제 강국’으로 평가받는 독일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독일 상장기업 전체의 시가총액을 넘어섰습니다. 심지어 독일과 이탈리아 상장기업 전체를 합친 시가총액보다도 큽니다.
전 세계 100여 개국 상장기업을 다 합친 것보다 클 정도입니다. 물론 엔비디아의 현재 평가에는 버블(거품) 논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는 게임,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기업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들은 ‘가상경제’와 ‘실물경제’라는 구분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양자는 이미 완전히 융합되어버렸고, 명확히 구분 짓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역할
경제가 발전하고 전환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국내적 관점에서 보면, 농업 시대에는 중앙집권형과 분권형 거버넌스가 각각 장단점을 가졌습니다. 계획경제 시기에는 정부가 명령과 통제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개혁과 함께 정부의 역할은 지도자(가이드)의 역할로 변화했습니다. 하지만 시장경제로 넘어오면, 중요한 경제적 결정은 성과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가들이 경쟁 환경 속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현재 중국의 경제 규모는 18조 달러에 달하며, 중국에는 1억 개가 넘는 기업이 매일 수천억, 많게는 수조 달러 규모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대하고 복잡한 경제의 모든 결정을 소수의 집단이 계획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현재 중국 생산의 절반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으며, 중국은 120개국 이상에서 1위 또는 2위 교역 상대국입니다. 이 국가들을 합치면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경제의 약 80%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들 나라 수십억 명의 일상생활이 중국 내 수십억 건의 민간 경제적 결정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중국 정부가 여전히 명령이나 지침 중심 사고방식으로 국내외 문제를 다룬다면, 이는 중국 14억 명뿐만 아니라 중국 외부 수십억 인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늘날 현실을 보면, 거의 모든 글로벌 주요 언론들이 매일 중국 관련 뉴스를 1면에 배치합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정책과 결정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며, 수십억 인구의 삶과 이해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농업경제에서 과학·기술 기반 현대 경제로 넘어가면서,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명령·통제형 역할에서 벗어나, 협력적·상담적·지원적·서비스 중심의 역할로 진화해 왔습니다. 이런 변화는 현대 경제 시스템의 규모와 복잡성에 맞는 방향입니다. 중국 역시 세계 무역에서의 특수한 역할과 경제적 현실에 맞춰 거버넌스 모델을 바꿔야 할 시점입니다. 중국이 전 세계와 교역하고, 생산의 절반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상대국의 이해관계, 관점, 그리고 경제적 현실까지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 세 가지 사례는 중국 경제가 중진국 단계에 진입하면서 겪게 되는 구조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경제적 발전 속도에 비해 전통, 거버넌스 체계, 인간 본성의 변화 속도가 훨씬 느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괴리입니다. 이러한 ‘성장의 간극’은 경제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사고방식과 체계를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수정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himcap.com/publ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