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 스티브 미란이 2024년 11월에 작성한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성을 위한 사용자 가이드』는 그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일명 ‘미란 보고서’로 불린다.
이 보고서는 개인 의견 기반의 정책 분석물이지만, 미국 정부가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만큼, 단순한 제안 이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고서를 직접 읽고 싶다면 본문 링크를, 이미 읽었다면 필자의 코멘트로 바로 넘어가길 권장한다.
배경과 문제의식
미국 제조업 쇠퇴의 구조적 원인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 저하가 아니라,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에 대한 과도한 글로벌 수요로 인한 구조적 강달러가 핵심 원인이다. 달러 가치가 지속적으로 고평가되면서 수출은 비싸지고 수입은 저렴해지는 왜곡된 무역구조가 형성되며, 이는 무역적자와 제조업 쇠퇴로 이어진다.
기축통화의 딜레마
세계 경제 안정을 위해 미국은 달러와 미국 국채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한다. 이로 인해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가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세계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그 부담은 미국에 집중된다. 결국 기축통화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해결 방안
마러라고 합의
미국은 동맹국들이 보유한 단기 미국 국채(1-10년물)를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으로 전환하도록 제안한다. 이는 미국의 국채 이자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달러 수요를 낮추어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구조적 해법이다.
무역과 안보를 분리할 순 없다. 미국은 동맹국에 국방 우산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경제적 양보를 받아야 한다. 이는 군사적 보호와 경제적 양보를 맞바꾸는 형태로, 한국과 일본 등 미국을 통해 국방 안보를 유지하는 국가들에겐 안보 제공을 협상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라는 명칭은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이자 외교 무대인 마러라고 리조트를 상징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이는 1985년 플라자 합의의 현대판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관세
2018-2019년 트럼프 대통령 1기 시절 중국 관세 경험을 토대로 관세의 실효성을 강조한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상품 818개 품목에 25%의 관세를 부과했으나, 중국 위안화 가치가 절하되면서 실질적 물가 상승은 없다.
즉, 미국이 관세를 올리면 상대국 통화가 절하되고, 수출품 가격이 낮아져 관세 효과가 상쇄된다. 나아가 관세는 통화 조정 유도뿐만 아니라 재정 수입 확보 및 협상 수단 등 전략적인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외환보유고
미국 재무부가 보유한 금을 매각하여 외화 자산을 구매함으로써 외환보유고를 확충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강달러 문제를 완화하고, 달러 수요를 분산시킬 수 있다. 현행 법상, 금을 매각하여 얻은 수익은 ‘국가 부채 상환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금 매각 수익을 달러 선도계약의 결제자금으로 사용한다면, ‘국가 부채 감소 목적’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필자 코멘트
미란 보고서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세계 패권국이자 기축통화국으로서 누리는 장점은 유지하되, 그로 인해 따라오는 구조적 부담은 다른 나라들과 나누겠다.’
1960년대 초반 브렌트우즈 체제 하, 벨기에 출신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은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나라가 세계 경제를 위해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하려면 무역수지 적자를 지속해야 하는데, 그 적자가 계속되면 결국 그 나라의 통화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트리핀의 딜레마’이고, 미란 보고서는 그 통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입증하는 현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미란이 제시한 전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미국 패권의 수명이 연장될 것이다. 그러나 어설프게 작동하면 달러의 종말을 더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정책안으로 채택하려면 더욱 정교하게 설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선 외교 합의와 자발적 희생이 필요하므로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힘센 친구가 골목으로 끌고 가 100년간 무이자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미란이 제시한 전략적 시스템은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현시점에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시장은 없다. 중국, 인도, 러시아 어느 국가도 아직은 ‘미국의 소비’를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향후 10년 뒤에는 ‘소비’ 시장의 상황이 바뀔 수 있다.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비’ 시스템이다. 히말라야 캐피탈의 수장 리루도 인터뷰에서 중국이 강해지기 위해선 저축을 소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국민의 저축이 소비로 전환되는 시점이 다가오면, 이는 미국의 크나큰 위험일 것이고, 그 상황이 되면 미국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 결국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면, 중국·인도 같은 나라들이 본격적인 소비 국가로 전환하기 전, 즉 ‘소비의 헤게모니’가 넘어가기 전에, 이와 같은 전략적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가동해 체제를 유지하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란 보고서는 그 자체로 높은 효용성을 갖는다.